눈이 오지 않는 나라에서 봅슬레이 팀이 나왔다. 1988년 캘거리의 이야기다.
트랙이 하나도 없는 나라에서 썰매 선수가 나왔다. 1990년대 한국의 이야기다.
두 나라 모두 남의 썰매를 빌려서 시작했다. 그런데 30년 뒤의 결말이 전혀 다르다.

손수레 경주를 보다가
1987년, 자메이카 킹스턴.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던 조지 피치와 사업가 윌리엄 멀로니가 현지의 손수레 내리막 경주를 구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자메이카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단거리 주자들이 있다. 봅슬레이는 출발 구간의 밀기가 승부를 가른다. 그렇다면 되는 것 아닌가.
문제는 선수 모집이었다. 육상 선수들 상당수가 그해 여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어서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에서 뽑았다.
마이클 화이트는 육군 스프린터였다. 데번 해리스는 800미터 선수였다. 더들리 스톡스는 헬기 조종사였다.
피치는 자기 돈 9만 2천 달러를 넣었다. 팀은 미국과 오스트리아에서 훈련했고, 국제연맹의 출전 요건을 채우기 위해 월드컵 대회에 나갔다.
캘거리 올림픽 개막 열흘 전

그런데 대회 개막 열흘 전,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자메이카의 출전을 막으려 했다.
이때 나선 사람 중 하나가 모나코의 알베르 공이었다. 그도 봅슬레이 선수로 여러 차례 올림픽에 나간 사람이다. 그가 위원들에게 한 말은 대략 이런 취지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람들은 조건을 다 충족해서 자격을 얻었으니, 광대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출전이 성사됐다.
그런데 캘거리에 도착한 뒤에도 일이 꼬였다. 4인승 팀원 한 명이 훈련 중 다쳤다. 대체 선수가 필요했다.
더들리 스톡스의 동생 크리스가 미국 아이다호에서 육상 장학생으로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형을 응원하러 올 예정이었다. 급히 불러들여 몇 시간 만에 출전 자격을 받았다.
봅슬레이를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썰매도 없었다. 피치는 캘거리의 한 술집에서 티셔츠 판매 계약을 맺었다. 아내가 디자인한 자메이카 봅슬레이 티셔츠였는데 불티나게 팔렸다. 그렇게 2만 4천 달러를 모아 캐나다 팀에게서 4인승 썰매를 샀다.
썰매 전복
2인승에서 스톡스와 화이트는 41개 팀 중 30위를 했다.
4인승에서는 넘어졌다. 마지막을 앞둔 주행에서 썰매가 전복됐다. 전 세계가 생중계로 그 장면을 봤다.
그리고 네 사람은 걸어서 결승선까지 갔다.
영화에서는 이들이 썰매를 어깨에 메고 걸어 나온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썰매 옆에서 함께 걸었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깨에 메는 것은 영웅적이고, 옆에서 걸어가는 것은 그냥 사람이 하는 일이다. 실제로 벌어진 쪽이 더 좋은 장면이라고 본다.
더들리 스톡스는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개인적으로는 극심한 창피였다고. 그때까지 자기 인생에 실패라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고.
1퍼센트만 사실
5년 뒤 이 이야기는 영화가 됐다. 1993년 개봉한 <쿨러닝>은 1억 5천만 달러 이상을 벌었다.
그런데 팀을 만든 조지 피치는 훗날 인터뷰에서 영화의 1퍼센트 정도만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실인 것은 전복 장면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허구라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그 유명한 구호도 순전히 할리우드가 만든 것이라고 했다.
실제 선수들은 영화에서처럼 육상 예선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군인이었다. 다른 팀들에게 조롱당하지도 않았다. 대체로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존 캔디가 연기한 코치도 실제 인물과는 상당히 달랐다.
지난 편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이야기를 했다. 여기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다만 이번에는 그 이야기가 워낙 사랑받아서, 당사자들도 굳이 크게 정정하지 않고 함께 살아왔다.
트랙이 없는 나라
이제 한국으로 와 보자.
1990년대 중반, 강광배라는 알파인 스키 선수가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고 연골이 손상됐다. 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 전문 스키 선수로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됐다.
그는 1995년 루지로 종목을 바꿨다. 이후 스켈레톤으로 갔고, 2003년에는 봅슬레이까지 손을 댔다.
세계 최초로 동계올림픽 썰매 세 종목에 모두 출전한 선수가 됐다. 이런 기록이 나온 이유는 그가 특별히 다재다능해서가 아니라, 한국에 그 종목을 하는 사람이 그 말고 없었기 때문이다.
썰매가 없어서 중고를 빌려 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에는 트랙이 없었다. 슬라이딩 센터가 지어진 것은 2017년이다. 그전까지 한국 선수들은 훈련하려면 외국에 나가야 했다.
트랙 없는 나라의 썰매 선수. 눈 없는 나라의 봅슬레이 팀과 정확히 같은 조건이다.
금메달로 결실을 맺다
그런데 이후가 달랐다.
강광배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39위, 2006년 토리노에서 20위를 했다. 성적만 보면 대단할 게 없다. 그러나 그는 계속 후배를 찾아다녔다. 발이 빠른 사람, 허벅지가 굵은 사람, 심지어 트럭 운전을 하던 사람까지 데려왔다.
2010년 밴쿠버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봅슬레이 4인승에 나가 19위를 했다.
2012년, 그가 상비군으로 뽑은 선수 중에 고등학생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윤성빈이었다.
2018년 2월 15일, 평창 알펜시아 올림픽 슬라이딩센터. 윤성빈은 1차 시기에서 50초 28을 기록했다. 그 트랙의 종전 기록을 0.36초 앞당긴 것이고, 2위와의 격차는 0.31초였다. 최고 속도는 시속 124.2킬로미터였다.
그는 금메달을 땄다. 아시아 선수가 썰매 종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것은 처음이었다. 같은 대회 봅슬레이 4인승에서는 은메달이 나왔다.빌린 중고 썰매에서 시작해 23년이 걸렸다.
이야기와 기록
자메이카는 이야기를 남겼다.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이 <쿨러닝>을 안다. 그 팀의 성적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은 기록을 남겼다. 금메달과 은메달, 그리고 자기 나라에 트랙 하나.
어느 쪽이 더 나은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메이카 팀은 아이디어가 나온 지 1년도 안 돼 올림픽에 갔다.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지난 편에서 다룬 그 규정 때문이다. 에디 디 이글 이후 도입된 출전 자격 기준이 그런 도전을 막는다.
윤성빈이 처음 스켈레톤을 탄 것이 2012년이고 금메달이 2018년이다. 6년이 걸렸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아주 빠른 편에 속하는 경우다.
낭만은 규정이 없던 시절의 것이다. 규정이 생기면 사고가 줄고 실력이 올라간다. 대신 손수레 경주를 보다가 봅슬레이 팀을 만드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크리스 스톡스는 지금 자메이카 봅슬레이 연맹 회장이다. 봅슬레이를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채 올림픽에 나갔던 그 사람이다.
강광배는 대학교수가 됐고, 평창에서는 해설을 맡았다. 윤성빈이 출발할 때 그는 마이크에 대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가라고, 가라고.
23년 전에 중고 썰매를 빌려 타던 사람이, 자기가 데려온 후배가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중계석에서 봤다.
시작할 때 그런 결말을 상상했을 리 없다. 그때는 그냥 탈 썰매가 없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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