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스키점프. 꼴찌를 한 선수가 대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됐다.
영국의 마이클 에드워즈, 별명은 에디 디 이글. 그는 70미터와 90미터 두 종목에서 모두 최하위였다. 우승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출전 자격 규정을 만들었다. 그 조항의 별명은 지금도 '에디 디 이글 룰'이다.
한 사람이 못했다는 이유로 규칙이 생긴 경우다. 이 시리즈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미장공의 아들
에드워즈는 잉글랜드 첼트넘의 노동자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알루미늄 문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고,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부도 모두 미장공이었다.
열세 살에 학교 수학여행으로 이탈리아에 갔다가 처음 스키를 신었다. 4년 뒤에는 영국 알파인 스키 대표팀에서 뛰고 있었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리프트 이용권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종목을 바꿨다. 스키점프였다. 리프트를 타지 않아도 되니 비용이 적게 들었고, 결정적으로 영국에는 스키점프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 경쟁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종목을 고른 것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그렇다. 그는 이 점을 숨기지 않았다.
여섯 켤레의 양말
준비 과정은 그야말로 맨몸이었다.
미국 레이크플래시드로 건너가 현지 코치들에게 배웠고, 남이 쓰던 장비를 얻어 썼다. 스키 부츠가 커서 양말을 여섯 켤레씩 껴 신었다. 헬멧은 끈으로 묶어 고정했다.
돈이 떨어지면 미장 일을 했다. 어머니 차에서 잤다. 핀란드에서는 병원 건물에 머물기도 했다. 그곳 코치 중 한 사람이 그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그 병원에서 영국 올림픽 대표로 선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몸무게도 문제였다. 82킬로그램 정도였는데, 그다음으로 무거운 선수보다 9킬로그램 이상 더 나갔다. 스키점프에서 이건 치명적이다.그리고 눈이 나빴다. 안경을 벗을 수 없었다. 콜드웨더용 스포츠 렌즈를 살 돈이 없었고, 당시에는 그런 제품 자체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두꺼운 안경을 쓴 채 고글 속에 넣고 뛰었다. 안경은 매번 김이 서렸다. 착지 지점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날아갔다는 뜻이다.
그런데 넘어지지 않았다
캘거리에서 그는 두 종목 모두 꼴찌를 했다.
여기서 사람들이 자주 놓치는 대목이 있다. 그는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뛰기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모든 점프를 끝까지 마쳤다.
스키점프는 실수하면 크게 다치는 종목이다. 장비가 몸에 맞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는 매번 침착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영국 신기록을 세웠다. 영국 최초의 올림픽 스키점프 선수였으니 당연히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 기록은 2001년까지 깨지지 않았다.
관중이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못할수록 인기가 올라갔다. 언론은 그의 인터뷰를 앞다투어 실었다. 자기 실력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에게 희망은 두 종류밖에 없다고. 밥 호프와 노 호프뿐이라고.
개막식에서 대회 조직위원장이 그의 이름을 직접 언급했다. 꼴찌를 할 선수의 이름이 개막식 연설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대회가 끝나고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움직였다.
1990년, 캘거리와 알베르빌 사이에 새 규정이 도입됐다. 올림픽에 나가려면 국제대회에서 상위 30퍼센트 안에 들거나 상위 50위 안에 들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둘 중 인원이 적은 쪽이 기준이 된다.
명분은 안전과 대회의 질이었다. 실제로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스키점프는 위험한 종목이고, 준비되지 않은 선수가 나오면 사고가 날 수 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조항은 앞으로 다시는 에디 같은 사람이 올림픽에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한 사람이 사랑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 같은 사람이 다시 나오지 못하게 됐다.
1948년 1월, 생모리츠
이제 40년을 거슬러 올라가 다른 이야기를 놓는다.
1948년 1월 30일부터 2월 8일까지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제5회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2차 대전 이후 처음 열린 올림픽이었다.
이 대회가 한국이 태극기를 들고 참가한 최초의 올림픽이다. 그해 여름의 런던 하계올림픽보다 여섯 달 앞선다.
당시 한국에는 정부가 없었다. 미군정 시기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그해 8월 15일이다. 나라가 서기 전에 올림픽에 나간 것이다.
선수는 세 명이었다. 스피드스케이팅 한 종목뿐이었다. 감독을 포함해도 다섯 명 남짓한 선수단이었다.
복권으로 간 올림픽
문제는 돈이었다.
정부도 없고 예산도 없는 상태에서 유럽까지 선수단을 보내야 했다. 조선체육회는 1947년 12월 올림픽 후원회를 통해 '올림픽 후원권'을 발행했다. 복권이었다. 우리나라 근대 복권의 효시로 꼽히는 물건이다.
국민들이 그 복권을 샀다. 지역에 따라서는 배정된 물량이 일찌감치 다 팔린 곳도 있었다. 1등 상금은 100만 원이었다.
1948년 4월 경향신문이 서울 지역 추첨 결과를 전하면서 당첨자 실명을 실었다. 은행 본점 직원 한 사람과 중국음식점에서 일하던 중국인 종업원 한 사람이었다. 신문에 이름이 실릴 만큼 화제였다.
그해 9월 동아일보에는 다른 소식이 실렸다. 충북 옥천의 가난한 농민이 당첨금 절반인 50만 원을 지방 교육사업에 써달라며 내놓았다는 것이다. 신문은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고 적었다.
돈이 없어 나가지 못할 뻔한 선수단을, 돈이 없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보냈다.
두 개의 가난
에디는 개인이 가난했다. 어머니 차에서 자고 남의 장비를 얻어 쓰며 혼자 버텼다.
1948년의 한국 선수단은 나라가 가난했다. 개인이 아무리 애써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고, 그래서 국민이 복권을 샀다.
성적은 둘 다 초라했다. 생모리츠의 세 선수는 입상권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적도, 제대로 먹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두 이야기 모두 남았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올림픽에 나갈 자격은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기록으로 정하면 깔끔하다. 상위 30퍼센트라는 숫자는 명확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다. 안전하기도 하다.
다만 그 기준으로 보면 1948년의 한국 선수단도 나갈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그들은 예선 통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후
에디는 캘거리 이후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다.
연 수입 5천 파운드의 미장공이었던 사람이 시간당 1만 파운드를 받는 강연자가 됐다. 3년 만에 100만 파운드를 벌었다는 보도가 있다. 미국 토크쇼에도 출연했다.그리고 재산 관리가 잘못돼 파산 신청을 했다.
이후 그는 다시 공부해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성화 봉송에 초청받았고, 2017년에는 쉰세 살에 캘거리로 돌아가 다시 점프대에 섰다. 관중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고, 그는 그 소리가 29년 전으로 자기를 데려갔다고 말했다.
2016년에는 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여담이지만 그 영화의 흥행 수입은 같은 대회에 나왔던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을 다룬 영화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1988년 캘거리는 그런 대회였다.
이 시리즈에서 나는 규칙집이 사고의 목록이라는 말을 여러 번 썼다. 링에서 사람이 죽어 라운드가 줄었고, 그라운드에서 사람이 쓰러져 구급차가 섰다.
에디의 경우는 다르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는 넘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조항이 생겼다. 그가 너무 유명해졌다는 이유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약자가 도전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그 이야기가 실제로 벌어지면, 제도는 그 다음번을 막는 쪽으로 움직인다.
1948년 겨울, 정부도 없는 나라에서 세 사람이 스위스로 떠났다. 복권을 사서 그들을 보낸 사람들은 메달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냥 우리 이름으로 저기 한번 서보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지금 규정으로는 그 마음이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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