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24일 오후 1시 30분,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여덟 명이 출발선에 섰다. 9초 79 뒤, 한 명이 세계신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날 네 명이 10초 벽을 깼다. 육상 역사상 한 경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3위 캘빈 스미스의 기록이 9초 99였는데, 3위가 10초를 깬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역사상 가장 빠른 100미터 결승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 그 기록은 사라졌다.
출발선의 여덟 명
벤 존슨은 마지막으로 스타팅 블록에 들어갔다. 뒤에 들어가는 쪽이 심리적으로 유리하다고 여겨지던 시절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면면이 대단했다. 직전 올림픽 챔피언 칼 루이스, 전 세계기록 보유자 캘빈 스미스, 훗날 올림픽 챔피언이 되는 린포드 크리스티. 사상 최고의 스프린터 라인업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총성이 울렸다. 존슨은 블록에서 튀어나갔고, 그 뒤로 단 한 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았다. 결승선을 지날 때 그는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옆 레인의 루이스는 온몸을 쥐어짜고 있었다.
9초 79. 자신이 1987년 로마 세계선수권에서 세운 9초 83을 스스로 지운 기록이었다.

약물 검사 결과
9월 27일, 발표가 나왔다. 존슨의 소변 샘플에서 스타노졸롤이 검출됐다. 금지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였다.
금메달이 박탈됐다. 세계기록도 말소됐다. 그는 서울에서 추방되듯 캐나다로 돌아갔다.
금메달은 9초 92를 기록한 칼 루이스에게, 은메달은 린포드 크리스티에게, 동메달은 캘빈 스미스에게 갔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 9월 30일, 존슨이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스테로이드를 사용했다고 인정하자 국제육상연맹은 1987년 로마의 9초 83마저 지웠다. 그 대회 금메달도 루이스에게 넘어갔다.
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집에서 두 번 지워졌다.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약물사용
여기까지가 대부분의 사람이 아는 이야기다. 야담은 그다음부터다.
시간이 흐르면서 밝혀진 사실이 있다. 그날 결승선에 섰던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결국 도핑 문제에 연루됐다.
칼 루이스도 포함된다. 훗날 그가 미국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각성제 양성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당시에는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던 일이다.
한 명이 걸렸고 일곱 명이 깨끗했던 경기가 아니었다. 한 명이 걸렸고, 나머지 중 다섯 명이 나중에 걸렸거나 의혹에 휘말렸다.
캘빈 스미스는 훗날 이 경기에 대해 자신이 사실상 우승자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씁쓸한 농담이지만, 기록집을 놓고 보면 반박하기 어렵다.
역사상 가장 빠른 레이스에 붙은 다른 별명이 그래서 생겼다. 역사상 가장 더러운 레이스.
세계 반도핑기구 탄생
우리는 도핑 이야기를 할 때 걸린 사람을 예외로 놓는다. 대부분은 정직한데 몇 명이 규칙을 어겼다는 식이다.
1988년 서울의 그 9초 79는 반대 그림을 보여준다. 그 시대의 최정상 여덟 명이 모였고, 그중 여섯이 어떤 식으로든 약물과 얽혀 있었다. 예외는 걸린 사람이 아니라 걸리지 않은 사람 쪽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남긴 것은 벤 존슨이라는 개인이 아니다. 검사 체계 전체가 그날부터 다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도핑 검사는 정교해졌고, 세계반도핑기구가 생겼고, 소급 검사와 저장 샘플 재검사가 도입됐다.
한 사람이 잡힌 사흘이 종목 전체의 규칙을 바꿨다.
25년 뒤, 잠실 주경기장
2013년 9월 24일, 벤 존슨이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 다시 섰다. 그날로부터 정확히 25년째 되는 날이었다.
반도핑 캠페인의 일환으로 세계를 도는 여정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그는 트랙에 나와 돌아와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여기서 역사가 만들어졌다고, 누군가는 나쁜 역사라고 하겠지만 자신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스테로이드를 썼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다만 서울에서만큼은 누군가 자기 음료에 약을 탔다고 지금도 주장한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25년 만에 자기 인생이 무너진 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가 서울이었다는 것이다.
서울이 본 것들
이 시리즈에서 1988년 서울은 벌써 세 번째다.
복싱 결승에서 열아홉 살 미국인이 금메달을 빼앗겼고, 밴텀급 한국 선수가 링에 67분을 앉아 있었고, 캐나다 스프린터가 9초 79를 뛰고 사흘 만에 그것을 잃었다.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세계에 스스로를 내보인 대회로 기억된다. 실제로 그랬다. 동시에 그 대회는 20세기 스포츠가 가진 문제들이 한자리에 드러난 대회이기도 했다. 판정의 부패, 개최국 편향, 그리고 약물.
한 나라가 국제 무대에 데뷔한 자리에서, 그 무대의 뒷면도 함께 드러난 셈이다.
기록은 지울 수 있다. 국제육상연맹은 실제로 두 번 지웠다.
그런데 그날 잠실에서 그 경기를 본 사람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텔레비전 앞에서 9초 79라는 숫자를 봤던 사람들은, 그 숫자가 취소됐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그 장면을 기억한다.
기록집에서 사라진 9초 79는 그래서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있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실제로는 모두가 아는 상태로.
무엇이 진짜 기록인가. 종이에 적힌 것인가, 사람들이 본 것인가.
나는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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