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 사진을 안다고 믿는다. 월계관을 쓰고 고개를 숙인 청년. 가슴께가 이상하게 뭉개진 신문 지면.
하지만 그날 그가 발에 무엇을 신고 42.195킬로미터를 달렸는지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록에 남은 답은 이렇다. 천으로 만든 일본식 버선에 얇은 고무를 덧댄 신발.
이름은 가나구리 타비. 배번은 382번이었다.

2시간 29분 19초 2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 마라톤은 대회의 마지막 공식 경기였고, 12만 명이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동양의 작은 청년이었다.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 2. 인간이 넘을 수 없다고 여겨지던 2시간 30분의 벽이 그날 처음 무너졌다. 뒤이어 남승룡이 3위로 들어왔다. 한 나라의 두 사람이 같은 경기에서 금과 동을 나눠 가진 것인데, 정작 그 나라의 이름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허진석의 연구를 보면 그날의 경주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담담하게 진행됐다. 손기정은 28킬로미터와 31킬로미터 사이에서 선두로 나섰고, 경기 중 최소 두 차례 물을 공급받았다. 강력한 우승 후보는 직전 대회 챔피언인 아르헨티나의 사발라였다. 그는 1년 전부터 베를린에 와 있었고, 정부 차원의 지원을 받았다. 손기정은 천 버선을 신고 있었다.
우리가 잘못 기억하고 있던 것들
야담을 쓰다 보면 늘 같은 일이 생긴다. 오래 전해진 이야기일수록 살이 붙어 있다.
국내 문헌들은 그날이 섭씨 30도가 넘는 폭염이었다고 적어왔다. 그런데 대회 공식 기록에 남은 그날의 기온은 21.0도에서 22.8도 사이다. 마라톤하기에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손기정이 사발라를 따돌렸다는 '비스마르크 언덕'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일본 양쪽 문헌에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공식 기록에는 그런 이름의 지점이 없다. 코스 전체의 표고차는 48.4미터 남짓, 대체로 평탄한 길이었다.
이 사실들이 그의 우승을 깎아내리는가. 나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한다. 폭염과 언덕이라는 극적인 장치가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훈련량과 페이스 배분과 신발 한 켤레다. 신화가 걷힌 자리에서 사람이 보인다.
지워진 국기, 남겨진 신발
정작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경기가 끝난 다음이다.
우승 직후 그는 베를린에 살던 안봉근의 집에서 열린 조선인들만의 축하 자리에 갔다. 안중근의 사촌이었다. 손기정은 그 집에서 생애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다고 한다. 스물넷의 올림픽 챔피언이 자기 나라 국기를 처음 본 것이다.
8월 13일,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시상대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실었다. 이때는 넘어갔다. 동아일보가 8월 25일자에 같은 일을 반복하자 총독부가 문제 삼았다. 사회부 체육주임 이길용 기자가 주도한 이 일로 관련자 여덟 명이 40여 일간 고문을 당했다.
10월 17일, 여의도 비행장. 금메달리스트가 귀국했지만 환영 행사는 일절 금지됐고, 일본 경찰은 그를 곧장 남산 조선신궁으로 연행했다. 그 무렵 그는 외국인들에게 사인을 해주며 이름 옆에 'Korean 손긔졍'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신발. 베를린 코스를 함께 뛰며 훈련했던 미국의 존 켈리가 손기정의 신발에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어 가져갔다. 켈리는 그 신발을 신고 훈련했고, 1945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10년 만에 두 번째 정상에 올랐다.
누군가에게는 가난의 증거였던 천 버선이, 누군가에게는 부적이었다.

같은 해, 로마로 실려간 돌기둥
1936년에는 다른 일도 있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고, 아크숨에 서 있던 고대 오벨리스크를 뽑아 로마로 실어갔다. 로마 한복판에 세워진 그 돌기둥은 제국의 전리품이었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남의 이름과 남의 국기를 달고 달렸고, 다른 쪽에서는 돌기둥이 배에 실려 바다를 건넜다. 두 사건은 서로를 몰랐다. 24년이 지나서야 하나로 이어진다.
그는 왜 신발을 벗었나
아베베 비킬라는 1932년 8월 7일에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이 열린 날이었다.
목동의 아들이었고, 소와 양을 몰며 자랐다. 달리기를 제대로 시작한 것은 스물네 살 때다.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의 근위대에 들어간 뒤 핀란드인 코치 오니 니스카넨을 만났다. 로마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그는 자기 최고 기록을 20분 가까이 단축하며 2시간 21분 23초로 우승했다. 팀에는 뒤늦게, 그것도 대체 선수로 합류했다.
그가 맨발로 뛴 이유에 대해서는 설이 갈린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공식 후원사가 준 신발 중 발에 맞는 게 없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그는 원래 맨발로 훈련해온 선수이기도 했다. 정작 본인의 대답은 달랐다. 왜 맨발이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조국 에티오피아가 언제나 결단과 용기로 이겨왔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다고 답했다.
우연이든 선택이든, 결과적으로 그것은 선언이 되었다.
개선문 아래에서
1960년 9월 10일, 로마. 출발이 워낙 늦어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코스를 밝혀야 했다. 카라칼라 욕장을 지나 아피아 가도를 따라 달리는 길이었다.
니스카넨과 아베베는 결승선 1킬로미터 남짓 앞에서 승부를 걸기로 미리 정해두었다. 하필 그 지점에 아크숨 오벨리스크가 서 있었다. 1936년에 그의 나라에서 뽑혀 온 그 돌기둥이다.
모로코의 라디 벤 압데셀람과 나란히 달리던 아베데는 오벨리스크를 알아보고 보폭을 늘렸다. 그리고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 60미터에서는 코스에 잘못 들어온 스쿠터를 피해야 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아래로 들어온 시각은 2시간 15분 16초 2. 세계신기록이었고, 종전 기록을 0.8초 앞당긴 것이었다. 압데셀람은 25초 뒤에 들어왔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선수가 딴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약탈당한 돌기둥 앞에서, 신발도 없이.

그 후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베베는 1964년 도쿄에서 다시 우승했다. 맹장 수술을 받은 지 40일 만이었고, 이번에는 신발과 양말을 신었다. 2시간 12분 11초 2, 또 세계신기록. 올림픽 마라톤 2연패는 그가 처음이었다.
1969년 3월 22일, 그는 황제가 선물한 차를 몰다 사고를 냈다. 목이 부러졌고 하반신이 마비됐다. 영국에서 여덟 달간 치료를 받고 상체 기능을 일부 회복했다. 그는 곧 다시 경쟁하기 시작한다. 1970년 스토크 맨더빌 대회에서 양궁과 탁구에 출전했고, 이듬해 노르웨이의 장애인 대회에서는 크로스컨트리 썰매 종목에서 우승했다.
성공한 사람에게 비극이 찾아온다고, 그는 말했다. 올림픽에서 이긴 것도 사고를 당한 것도 신의 뜻이라고. 두 가지 모두 삶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1973년 10월 25일, 4년 전 사고의 후유증인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마흔한 살이었다. 국장이 치러졌고 하일레 셀라시에는 국가 애도의 날을 선포했다.
손기정은 훨씬 오래 살았다. 2002년까지, 아흔 살까지. 1988년 서울에서 그는 성화를 들고 잠실 트랙을 뛰었다. 쉰두 해 전 베를린에서 달지 못했던 국기가 그날은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 사람은 신발을 신고 뛰었지만 이름을 빼앗겼고, 한 사람은 신발을 벗고 뛰어 이름을 되찾았다. 두 사람 모두 1936년이라는 해에 각자의 방식으로 묶여 있었다.
가끔 생각한다. 존 켈리가 가져간 그 천 버선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부적이라 믿었던 사람의 손을 거쳐, 그것은 결국 누구의 물건이 되었을까.
빼앗긴 것들은 대개 돌아오지 않는다. 아크숨의 오벨리스크는 그래도 2005년에 에티오피아로 돌아갔다. 돌기둥은 돌아갔는데, 그 앞을 맨발로 지나간 사람은 이미 3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