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축구 이야기

오프사이드 규칙은 어떻게 변화되어 왔을까

by marsol-sports 2026. 8. 31.
반응형

축구를 보다 보면 가장 억울한 순간이 있다. 골망이 흔들렸는데, 관중석이 일어섰는데, 부심의 깃발이 올라가 있다. 어깨 하나, 발끝 하나가 앞섰다는 이유로 골이 사라진다.

이 규칙을 처음 만든 사람들은 그런 장면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들이 금지하려던 것은 앞선 어깨가 아니었다. 앞으로 가는 것 자체였다.

전방 패스가 금지되던 시절

1863년 11월, 런던에서 축구협회가 만들어지고 최초의 경기 규칙이 공표됐다. 그 안에 담긴 오프사이드는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 전혀 달랐다. 상대 진영에서 앞으로 공을 차는 행위 자체가 금지였다.

 

공을 가진 팀의 선수는 공과 나란히 있거나 그 뒤에 있어야 했다. 공이 자기보다 앞으로 넘어가면 그 공은 건드릴 수 없었다. 상대가 걷어내거나, 온사이드 위치의 동료가 다시 잡아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까 초기의 축구에는 패스가 없었다. 공을 가진 선수가 드리블로 밀고 나가면 동료들은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공을 빼앗기면 뒤에 있던 사람이 이어받아 다시 밀고 나갔다. 럭비를 떠올리면 정확하다. 실제로 두 경기는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참이었고, 축구는 아직 럭비의 문법을 벗지 못한 상태였다.

 

왜 그랬을까. 골문 앞에 죽치고 서서 공이 오기만 기다리는 선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그것은 비겁한 짓이었다. 스포츠는 신사의 것이어야 했고, 신사는 요행을 노리지 않는다.

세 명이면 된다

3년 만에 규칙이 흔들렸다. 1866년 2월, 협회는 처음으로 규칙을 손봤다. 앞으로 공을 차도 좋다, 다만 받는 사람 앞에 상대 선수가 셋은 있어야 한다. 골키퍼도 그 셋에 들어갔다.

 

작은 완화처럼 보이지만 이것으로 축구는 다른 경기가 됐다. 패스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공을 앞으로 보낼 수 있게 되자 선수들은 흩어지기 시작했고, 흩어진 자리를 잇는 선이 생겼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축구의 골격이 이때 잡혔다.

그리고 이 규칙은 60년 가까이 유지됐다.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는.

오프사이드의 왕

벨파스트 출신의 풀백 한 사람이 있었다. 빌 매크래큰. 1904년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입단해 19년을 그곳에서 뛴 선수다.

그는 규칙의 빈틈을 발견했다. 상대 공격수 앞에 세 명이 있어야 한다면, 두 명만 남기고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가면 그만이다. 공이 넘어오는 순간 수비수가 한 걸음 전진하면 공격수는 자동으로 오프사이드가 된다. 매크래큰은 이 동작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필요하면 하프라인까지 나가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노츠 카운티의 풀백 몰리와 몽고메리가 먼저 썼다. 다만 매크래큰이 그것을 완성했고, 그래서 모두가 따라 하게 됐다.

관중은 그를 미워했다. 상대 팀도, 심판도 그를 미워했다. 한번은 그의 오프사이드 트랩에 격분한 관중이 경기장으로 뛰어들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이 전술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매크래큰주의.

질식

1920년대 중반이 되자 축구는 숨을 쉬지 못했다. 모든 팀이 트랩을 썼다. 양쪽 수비가 동시에 앞으로 나오니 경기는 하프라인 양옆의 좁은 띠 안에서만 벌어졌다. 골문 근처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부심의 깃발은 쉬지 않았다. 한 경기에 오프사이드 판정이 서른 번, 마흔 번씩 나왔다. 신문은 이것을 끝나지 않는 호루라기라고 불렀다.

 

관중이 떠나기 시작했다. 1925년 2월, 뉴캐슬이 베리 원정에서 0-0으로 비긴 경기가 마지막 한 방울이었다. 축구는 지루했고 입장 수입은 줄고 있었다.

 

협회는 하이버리에서 시험 경기를 열었다. 아마추어 팀과 프로 팀을 붙여놓고 전반전은 기존의 세 명 규칙으로, 후반전은 두 명 규칙으로 치르게 했다. 결과는 명확했던 모양이다. 이 안을 국제축구평의회에 정식으로 올린 것은 잉글랜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축구협회였다.

1925년 6월 13일, 파리 뤼 드 롱드르 22번지. 평의회는 표결로 규칙 11조를 고쳤다. 세 명에서 두 명으로. 그해 시즌부터 적용됐다.

42퍼센트

숫자는 정직했다. 새 규칙이 적용된 첫 시즌, 1부 리그의 득점은 전 시즌보다 42퍼센트 넘게 늘었다.

수비하던 사람들은 당황했다. 뒷공간이 열렸고 실점이 쏟아졌다. 아스널의 허버트 채프먼이 이때 내놓은 답이 WM 포메이션이다. 센터하프를 뒤로 내려 새로 생긴 구멍을 메우는 방식이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축구 전술의 표준이 됐다.

 

말하자면 이렇다. 한 사람이 규칙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그 때문에 규칙이 바뀌었고, 바뀐 규칙이 새로운 전술을 낳았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든 경기의 기하학은 1925년 6월의 그 표결 위에 서 있다.

남은 이야기

매크래큰은 그 경기를 뛰지 못했다. 규칙이 바뀌기 전인 1923년에 이미 은퇴한 뒤였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너뜨린 세계와, 자기 때문에 새로 세워진 세계 사이에서 그는 관중석에 있었다.

 

훗날 헐 시티의 감독이 된 그는 새 규칙 아래에서도 여전히 잘했다. 규칙이 바뀐 첫 시즌, 92개 구단 가운데 개막 다섯 경기에서 한 골도 내주지 않은 팀은 헐뿐이었다고 전한다.

 

규칙은 이후로도 계속 움직였다. 1990년에는 최종 수비수와 나란히 서 있어도 온사이드가 됐고, 2003년에는 오프사이드 위치에 서 있는 것만으로는 반칙이 아니라는 해석이 붙었다. 지금은 카메라가 밀리미터를 잰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화를 냈다. 축구가 망가진다고, 이건 축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축구는 늘 그렇게 만들어져 왔다. 누군가 빈틈을 파고들고, 경기가 재미없어지고, 규칙이 바뀌고, 다시 누군가 새 빈틈을 찾는다.

지금 우리가 부심의 깃발을 보며 억울해하는 그 순간도, 백 년 뒤 누군가에게는 축구가 또 한 번 자기 모습을 바꾸던 시절의 이야기로 읽힐지 모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