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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일반

올림픽: 맨발로 로마를 달린 남자

by marsol-sports 2026.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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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9월 10일 밤, 이탈리아 로마.

고대 로마의 상징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향해 한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신발은 없었다. 맨발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스물여덟 살의 아베베 비킬라. 그는 2시간 15분 16.2초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세계기록이자 올림픽 기록이었고, 아프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안긴 순간이었다.

그날 밤 세계는 낯선 이름 하나를 알게 됐다. 다만 사람들이 가장 먼저 기억한 것은 기록이 아니었다. 맨발이었다.

1960년 로마올리픽 마라톤경기에서 맨발로 1등으로 들어오는 아베베 비킬라 선수
1960년 로마올리픽 마라톤경기에서 맨발로 1등으로 들어오는 아베베 비킬라 선수

원래 나갈 선수가 아니었다

아베베는 애초에 로마행 명단에 없었다.

에티오피아 황실 근위대 소속 군인이었던 그는 대표 선발 과정에서 이름을 올렸지만, 최종적으로 팀에 합류한 것은 와미 비라투가 부상을 당한 뒤였다. 사실상 대체 선수였다.

 

다만 실력이 없어서 밀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발전을 겸한 아디스아바바 대회에서 그는 2시간 21분 23초를 기록했다. 고지대에서 나온 기록이었고, 당시 올림픽 기록보다 빨랐다.

그를 발굴하고 훈련시킨 사람은 에티오피아 정부가 고용한 스웨덴인 코치 온니 니스카넨이었다. 그래도 로마에서 아베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회 전 우승 후보는 세계기록 보유자인 소련의 세르게이 포포프였다.

신발을 벗다

아베베가 처음부터 맨발로 뛰려던 것은 아니다.

로마에 도착한 뒤 그는 새 신발을 구했다. 그런데 발에 맞지 않아 물집이 생겼다. 대회 후원사가 가지고 있던 재고 중에 그의 발에 편한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결국 그는 신발을 벗기로 했다. 훗날 이 결정은 용기의 상징처럼 이야기되지만, 출발선의 그에게는 대단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불편한 신발보다 익숙한 맨발이 낫다는 것.

횃불 아래를 달렸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마라톤은 지금과 분위기가 달랐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오후 늦게 출발했고, 코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시작해 개선문에서 끝났다. 42.195킬로미터를 달리는 동안 해가 졌다.

특히 후반 구간은 고대 로마의 길인 아피아 가도를 지났다. 어둠 속에서 선수들이 달렸고, 코스 양옆에는 횃불을 든 이탈리아 군인들이 서 있었다. 도시의 조명과 관중 대신 유적과 불꽃이 선수들을 비추던 밤이었다.

두 사람만 남았다

초반의 아베베는 서두르지 않았다. 10킬로미터 지점까지는 선두 그룹 안에 섞여 있었다.

20킬로미터를 지나면서 경기의 모양이 잡혔다. 아베베와 모로코의 라디 벤 압데셀람, 두 아프리카 선수가 앞으로 나갔고 나머지가 처졌다. 압데셀람은 불과 이틀 전 1만 미터 결승에서 14위로 달렸던 선수였다.

 

여기에 작은 착오가 하나 있었다. 니스카넨은 아베베에게 경계해야 할 상대의 배번을 알려줬는데, 실제로 압데셀람이 단 번호는 그것과 달랐다. 아베베는 끝까지 옆에서 함께 달리는 선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는 채로 뛰었다.

41킬로미터

두 사람의 승부는 마지막 1킬로미터가 조금 넘게 남은 지점에서 갈렸다.

그 자리에는 악숨 오벨리스크가 서 있었다. 1937년 무솔리니의 군대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고 본국으로 가져온 전리품이었다. 아베베의 나라에서 뜯어온 돌덩이가 로마 한복판에 세워져 있었고, 그 앞을 에티오피아 선수가 맨발로 지나가고 있었다.

 

바로 거기서 아베베가 속도를 올렸다. 압데셀람은 따라붙지 못했다.

결승선에서의 차이는 약 25초였다. 기록 2시간 15분 16.2초는 포포프의 세계기록을 0.8초 앞당긴 것이었다. 은메달은 압데셀람, 동메달은 뉴질랜드의 배리 매기였다.

맨발보다 중요한 것

이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대개 맨발에 집중한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마라토너였다. 맨발은 상징이 됐지만 금메달을 가져온 것은 훈련과 페이스 관리, 체력, 그리고 마지막 1킬로미터의 판단이었다.

 

훗날 왜 맨발로 뛰었느냐는 질문에 그가 남긴 답도 신발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나라 에티오피아가 언제나 투지와 영웅적인 태도로 이겨왔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4년 뒤, 그리고 40일 전

1964년 도쿄. 아베베가 다시 출발선에 섰다. 이번에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다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는 대회를 불과 40일 앞두고 충수 절제 수술을 받았다. 복부를 연 지 한 달 남짓한 몸으로 42킬로미터를 달려야 했다.

 

경기 초반에는 다시 서두르지 않았다. 15킬로미터를 지나며 속도를 올렸고, 20킬로미터 무렵 선두권에 붙었으며, 후반은 독주였다.

기록은 2시간 12분 11.2초. 다시 세계기록이었다. 2위 배질 히틀리와의 차이는 4분이 넘었다.

올림픽 마라톤 2연패는 그가 처음이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 제일 먼저 들어오는 아베베
1964년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 제일 먼저 들어오는 아베베

결승선 뒤의 체조

도쿄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기록만이 아니었다.

결승선을 통과한 아베베는 쓰러지지도, 눕지도 않았다. 대신 트랙 안쪽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다리를 뻗고, 허리를 굽히고, 체조 동작을 이어갔다. 7만 명이 지켜보는 앞이었다.

세계기록으로 마라톤을 막 끝낸 사람이, 이제 훈련을 시작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세 번째 도전

1968년 멕시코시티. 그는 3연패에 도전했다.

그러나 다리 부상을 안고 출발했고 17킬로미터 지점에서 멈춰야 했다. 기권하면서 그는 팀 동료 마모 월데에게 말했다. 에티오피아의 금메달은 이제 네 어깨에 달렸다고.

마모 월데가 그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에티오피아의 3연속 마라톤 금메달이었다. 아베베가 만든 흐름은 그가 뛰지 못한 대회에서도 끊기지 않았다.

1969년

이듬해 3월, 아베베는 자신의 폭스바겐 비틀을 몰다가 사고를 당했다.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가 올림픽 우승 이후 선물한 차였다.

목이 부러졌고 척수가 손상됐다. 처음에는 목 아래가 전부 마비된 상태였고, 여러 차례 수술을 거쳐 상체를 쓸 수 있는 정도까지 회복했다. 두 다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멀리 달리던 사람이 휠체어에 앉게 됐다.

그럼에도 그는 경기를 멈추지 않았다. 스토크맨더빌 대회에서 양궁과 탁구에 출전했고, 1971년에는 노르웨이에서 열린 개썰매 크로스컨트리 대회에 나가 우승했다.

41년

아베베 비킬라는 1932년 8월 7일에 태어나 1973년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마흔한 살이었다. 사인은 사고 후유증에서 비롯된 뇌출혈이었다.

장례식에는 수만 명이 모였고 황제가 국가 애도를 선포했다.

선수로서의 기록은 짧고 선명하다. 1960년부터 1966년까지 마라톤 열세 번에 출전해 열두 번 우승했다. 유일한 패배는 1963년 보스턴 마라톤 5위였다.

문이 열렸다

아베베의 로마 우승은 에티오피아의 첫 올림픽 금메달이었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선수가 딴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모두가 아는 대로다. 킵 케이노, 미루츠 이프터, 데라르투 툴루,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 케네니사 베켈레, 그리고 엘리우드 킵초게까지. 세대는 바뀌었지만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1960년 로마의 밤과 만난다.

진짜 최고의 경기는 어디였을까

사람들은 맨발의 로마를 기억한다. 사진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고대의 길, 횃불, 맨발, 그리고 금메달.

그러나 선수로서 더 놀라운 경기는 4년 뒤 도쿄였는지도 모른다. 수술한 지 40일 된 몸으로 세계기록을 세우며 4분 차 우승을 했고, 결승선을 통과한 뒤에는 체조를 했다.

맨발이 아니어도 그는 여전히 아베베였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맨발의 마라톤 영웅이라는 한 줄로 정리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는 맞지 않는 신발을 벗고 자기 방식으로 달렸고, 수술을 받고도 다시 출발선에 섰으며, 두 다리를 잃은 뒤에도 다른 종목의 출발선에 섰다.

1960년 로마에서 그가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그것은 한 선수가 금메달을 딴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것은 한 시대가 시작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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