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의 이야기는 대개 마지막 경기에서 끝난다. 그런데 사람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스무 살에 세계 챔피언이 된 사람에게도, 서른에 국민 영웅이 된 사람에게도, 그 뒤로 40년이 남아 있다. 야담이 관심을 두는 것은 대체로 그 40년이다.

김일 - "너는 조선사람이니 박치기를 익혀라"
김일은 1929년 전남 고흥의 섬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8년부터 씨름 선수로 뛰었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80센티미터였다. 1956년 여수에서 선원들에게 얻은 일본 잡지에서 역도산에 관한 기사를 읽었고, 그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불법 체류자로 붙잡혀 1년을 형무소에서 보냈다. 1957년에야 도쿄의 역도산 체육관에 문하생 1기로 들어갔다.
박치기는 그때 만들어졌다. 함경도 출신인 역도산은 평양 박치기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그는 김일에게 조선 사람이니 박치기를 익히라고 했다. 그리고 재떨이와 골프채로 제자의 이마를 두들겨 단련시켰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춘다. 사람의 몸 한 부위를 도구로 쳐서 무기로 만드는 훈련. 그것이 통했다는 것, 그래서 그가 스타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결국 그 부위가 그를 무너뜨렸다는 것.
흑백 TV 앞의 30년
196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는 세계프로레슬링협회 챔피언에 올랐다. 그해 스승 역도산은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김일은 30년 현역 생활 동안 스무 차례 넘게 세계 타이틀을 땄다. 1960년대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은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
전쟁의 폐허에서 막 일어서던 사람들이 흑백 TV 앞에 모여 앉아, 덩치 큰 외국 선수가 박치기 한 방에 넘어가는 장면에 환호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의 경기를 보러 장충체육관에 자주 갔다고 전해진다.
프로레슬링이 쇼라는 장영철의 폭탄선언 이후 인기는 서서히 식었지만, 김일은 1970년대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김일 선수의 이마의 값
1980년대 중반, 그가 벌인 활어 수출 사업이 실패했다.
그 무렵부터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박치기 후유증에 당뇨병이 겹쳤다. 고혈압, 하지부종, 신부전증이 차례로 찾아왔다.
1994년부터 그는 을지병원에서 무료로 입원 치료를 받았다. 병원 이사장이 그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이다. 국민 영웅이 팬의 호의로 병상을 얻은 것이다.
1995년 4월 2일, 도쿄돔. 일본 최고의 프로레슬링 단체들이 함께 연 올스타 흥행 자리에서 그의 은퇴식이 열렸다. 6만 명이 지켜봤다.그는 휠체어를 타고 입장했다. 그리고 링 포스트를 몇 차례 두드린 뒤 링을 떠났다. 박치기로 세상을 넘어뜨리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손으로 링을 두드렸다.
41년 만의 화해
2006년 2월, 김일은 장영철을 찾아갔다.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그 발언 이후 41년 동안 등을 돌리고 지낸 사이였다. 두 노인은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고 화해했다.
장영철은 그해 8월에 세상을 떠났다. 김일은 두 달 뒤인 10월 26일에 떠났다. 일흔일곱이었다.
41년을 미루다 마지막 해에 겨우 화해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못 했을 일이다.
그의 유해는 고향 고흥의 생가 옆에 묻혔다가, 2020년 5월 대전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 묘역으로 옮겨졌다.
마이크 타이슨 - 스무 살의 챔피언

1986년 11월, 마이크 타이슨은 스무 살에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됐다. 역대 최연소였다. 이듬해 통합 챔피언에 올랐다.
그가 얼마를 벌었는지는 자료마다 다르다. 전성기 순자산이 3억 달러 수준이었다는 추정이 가장 자주 인용되고, 통산 수입은 그보다 훨씬 크게 잡는 자료도 있다.
돈은 그가 쓰는 방식으로 사라졌다. 벵골 호랑이를 여러 마리 길렀는데 한 마리당 7만 달러였고, 돌보는 조련사에게 해마다 12만 5천 달러를 줬다. 친구들에게 차를 사줬다. 저택을 샀다.
그 사이 1990년 도쿄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버스터 더글러스에게 졌다. 1992년에는 성폭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3년을 복역했다. 1997년 홀리필드전에서는 상대의 귀를 물어 자격을 잃었다.
2003년, 그는 파산을 신청했다. 신고된 부채는 2,300만 달러였다.
다시 링으로
김일은 병상에서 12년을 보냈고, 타이슨은 파산 이후 20년 넘게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영화에 나왔다. 1인극 무대에 섰다. 팟캐스트를 했다. 대마초 사업을 했다. 그리고 다시 링에 올랐다.
2020년 11월, 쉰네 살의 타이슨이 익시비션 경기를 치렀다. 상대는 로이 존스 주니어였다.
그렇다. 1988년 서울에서 금메달을 빼앗겼던 그 열아홉 살이다. 두 사람 다 쉰을 넘긴 뒤였고,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타이슨은 이 경기로 1천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11월에는 쉰여덟에 제이크 폴과 싸웠다. 넷플릭스로 생중계됐고, 판정으로 졌다. 그리고 2천만 달러를 벌었다.
김일과 타이슨 - 두 선수의 말년
한 사람은 몸을 다 쓰고 병상에 누워 12년을 보냈고, 팬이 마련해준 병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른 한 사람은 돈을 다 쓰고 파산했다가, 자기 이름 하나로 다시 수천만 달러를 벌었다.
무엇이 두 말년을 갈랐을까. 개인의 성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김일에게는 팔 수 있는 이름이 있었지만 그것을 살 시장이 없었다. 타이슨에게는 넷플릭스가 있었다.
1960년대 한국에서 프로레슬러가 은퇴 후 할 수 있는 일은 후배를 가르치거나 사업을 하는 것뿐이었다. 지금이라면 김일은 유튜브 채널을 열었을 것이고,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을 것이고, 아마 그의 이마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었을 것이다.
시대가 사람의 말년을 결정한다. 우리가 개인의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 중 상당수가 사실은 그가 태어난 연도의 문제다.
지금까지 여섯 편을 썼다. 빼앗긴 것, 잘못 주어진 것, 스스로 잃은 것, 되돌릴 수 있는가, 허락받지 못한 것, 그리고 끝난 뒤에 남는 것.돌아보니 결국 같은 이야기를 여섯 번 한 것 같기도 하다. 경기는 짧고 그 뒤가 길다는 것.
우리는 스포츠를 결과로 기억한다. 금메달인가 은메달인가, 이겼나 졌나. 그런데 사람에게 남는 것은 대체로 그 결과가 아니라, 결과가 정해진 다음에 살아야 했던 수십 년이다.
박치기로 세상을 넘어뜨리던 사람이 마지막에 손으로 링을 두드리던 장면을, 나는 오래 생각한다. 그 순간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아무 말도 아니었을까. 그냥, 여기까지 왔다는 인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