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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이야기

이기면 죽는다고 했다 — 전쟁이 만든 경기, 그 위에 얹힌 이야기

by marsol-sports 2026.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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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8월 9일, 독일 점령하의 키이우. 제니트 경기장에 2천 명이 모였다.

한쪽은 빵공장 노동자들로 구성된 FC 스타르트. 원래는 디나모 키이우와 로코모티우 키이우의 프로 선수들이었다.

다른 한쪽은 독일 공군 대공포 부대의 팀 플라켈프.

 

경기 전 친위대 장교가 스타르트 라커룸에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경기는 스타르트가 5대 3으로 이겼다.

그리고 이 경기에 '죽음의 경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2차대전 중 영국의 축구경기
2차대전 중 영국의 축구경기

키이우 빵공장의 팀

이야기의 시작은 니콜라이 트루세비치라는 골키퍼다.

디나모 키이우의 골키퍼였던 그는 전쟁이 나자 입대했고, 키이우가 함락되면서 포로가 됐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시장에서 라이터를 팔며 살았다.

그를 알아본 사람이 키이우 제1빵공장의 관리자였다. 그는 트루세비치에게 일자리를 줬고, 곧 옛 동료들도 같은 공장에 들어왔다. 디나모와 로코모티우, 그리고 다른 클럽 출신 선수 아홉 명 남짓이 모였다.

 

이들이 공장 팀을 만들었다. 이름은 스타르트였다.

1942년 여름, 이들은 키이우에 급조된 리그에 참가했다. 헝가리와 루마니아 주둔 부대 팀들을 차례로 이겼다. 이 지역에서 가장 강한 팀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이 독일 공군 팀에 닿았다. 8월 6일 첫 경기에서 스타르트가 5대 1로 이겼다. 독일 측이 재대결을 요구했다. 그 재대결이 8월 9일이었다.

독일군과의 경기 후 벌어진 일

니콜라이 트루세비치

경기 후 스타르트 선수들이 체포됐다. 여러 명이 바빈야르와 시레츠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소련은 이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했다. 선수들은 지지 않으면 죽는다는 협박을 받았고, 그럼에도 이겼고, 그 대가로 처형됐다.

 

이 버전이 책이 되고 영화가 되고 기념비가 됐다. 지금도 키이우에 그 기념비가 서 있다.

야담은 여기서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체포는 경기 직후가 아니었다. 여러 자료가 8월 18일, 그러니까 재대결로부터 아흐레 뒤였다고 적는다. 경기 다음 날에도 선수들은 함께 모였고, 경기 후 찍은 단체 사진에는 양 팀 선수들이 나란히 서 있다.

 

1990년대 이후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이 문서를 검토한 결과, 체포 사유는 경기 결과가 아니라 이들의 과거 소속과 소련 보안기관 관련 혐의 쪽에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실제로 처형된 선수 중 여러 명이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장교 신분이었다.

 

빵공장 노동자 상당수가 함께 처형됐다는 기록도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어느 쪽도 축구와 관련이 없다.

독일 함부르크 검찰이 1972년부터 2005년까지 이 사건을 조사했다. 결론은 이랬다. 선수들의 죽음이 경기 결과와 연결됐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 선수의 아들은 2002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기 직후 아무도 잡혀가지 않았고, 처형은 대략 반년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고.

남겨진 사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거짓인가.

나는 그렇게 정리하고 싶지 않다.

확실한 것들이 있다. 점령당한 도시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팀을 만들었다. 점령군 팀을 상대로 두 번 이겼다.

2천 명이 그 경기를 봤다. 그리고 그중 여러 명이 몇 달 안에 목숨을 잃었다.

여기까지가 사실이다.

 

거기에 얹힌 것은 인과관계다. 이겨서 죽었다는 인과. 그 인과가 이야기를 완결시키고, 완결된 이야기가 기억되기 쉽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실제보다 크다. 그런데 그 이야기 덕분에 열한 명의 이름이 남았다.

만약 인과가 없었다면, 그러니까 그냥 점령기에 축구를 하다가 나중에 다른 이유로 죽은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몰랐을 것이다.이야기가 사실을 왜곡했고, 동시에 사실을 보존했다.

1954년, 대한해협

한국 전쟁이 멈춘 지 1년도 되지 않은 때였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과 일본이 붙게 됐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국교 정상화 전이라며 일본 대표팀의 방한을 불허했다. 결국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치러야 했다.

출국 인사차 경무대를 찾은 이유형 감독이 남긴 말이 있다. 일본에 지면 선수단 전원이 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은 1차전에서 5대 1로 이겼다. 일주일 뒤 2차전은 2대 2 무승부였다. 1승 1무로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었다.

유니폼 한 벌

여기서부터가 이 편에 이 이야기를 넣은 이유다.

전란 직후의 나라에 스위스행 항공권이 있을 리 없었다. 대표팀은 미 군용기를 얻어 타고 도쿄로 건너간 뒤, 현지에서 겨우 구한 민간 항공기 좌석에 나눠 앉아 환승을 반복했다.

 

지급된 유니폼은 한 벌이었다. 축구화 가방도 없어서 광목천으로 만든 보따리에 징 박은 축구화를 싸 들고 다녔다. 등번호는 천에 써서 유니폼 뒤에 꿰매 붙였다.

 

6월 17일 취리히. 첫 상대는 푸스카시가 이끄는 헝가리였다.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결과는 0대 9였다. 장시간 비행의 여파로 경기 중 여러 선수의 다리에 쥐가 났다. 교체 제도가 없던 시절이라 다시 일어나 뛰었다.

사흘 뒤 터키전은 0대 7이었다.두 경기 무득점 16실점. 대표팀은 그 성적표를 들고 돌아왔다.

반대 방향의 신화

키이우 이야기에서는 신화가 사실보다 컸다.

한국 이야기에서는 신화가 사실보다 작다.

대한해협 발언은 지금도 유명하다. 그런데 유니폼이 한 벌이었다는 것, 등번호를 천에 써서 꿰맸다는 것, 경기 중 쥐가 나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된다.

 

0대 9와 0대 7이라는 숫자가 앞을 가리기 때문일 것이다. 창피한 기록으로 분류되면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들여다보지 않게 된다.1954년의 한국 축구 대표팀은 나라가 반으로 갈라지고 전쟁이 끝난 자리에서, 유니폼 한 벌을 들고 유럽으로 갔다.

전쟁과 경기

1942년 키이우의 빵공장 노동자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우리가 아는 것은 그들이 축구를 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같은 도시에서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름이 남지 않았다.

1954년의 그 열악한 여정을 우리가 아는 것도 그들이 경기를 하러 갔기 때문이다.

같은 해 같은 나라에서 훨씬 많은 사람이 더 힘든 일을 겪었지만 기사가 되지 않았다.

경기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한다. 다만 경기가 있으면 기록이 남고, 기록이 남으면 나중에 누군가 그것을 읽는다.

 

키이우의 기념비에는 선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54년 대표팀의 이름은 어디에 새겨져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협회 자료에는 남아 있을 것이다.

무득점 16실점이라는 기록도 기록이다. 그 옆에 유니폼이 한 벌이었다는 문장을 나란히 적어두면, 그 숫자는 다르게 읽힌다.

야담을 쓰는 일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숫자 옆에 문장을 하나 붙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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