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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이야기

여자축구 이야기 - 5만 3천 명이 보던 경기가 금지됐다

by marsol-sports 2026.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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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 26일, 리버풀 구디슨 파크. 5만 3천 명이 경기장을 채웠고 1만 4천 명가량이 들어오지 못한 채 밖에 남았다.

그해 FA컵 결승 관중이 5만 18명이었다. 그러니까 그날 그 경기는 잉글랜드 최대 축구 이벤트보다 사람이 많았다.

여자축구 경기였다.

그리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축구협회는 여자축구를 금지했다.

군수공장에서 시작된 팀

딕 커 레이디스는 1917년 프레스턴의 딕 커 앤드 컴퍼니라는 군수공장에서 만들어졌다.

1차 대전 중이었다. 남자들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공장은 여성 노동자들로 채워졌고, 점심시간에 공을 차던 것이 팀이 됐다. 공장끼리 자선경기를 하기 시작했다.

 

1917년 크리스마스에 프레스턴에서 열린 여자 경기에 1만 명이 왔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인기는 식지 않았다. 오히려 커졌다.

이 팀의 간판은 릴리 파였다. 열네 살에 축구를 시작했고, 키가 180센티미터에 가까웠으며, 왼발 슛이 무시무시했다. 30년 가까운 선수 생활 동안 900골에서 1,000골 사이를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딕 커 레이디스는 통산 828경기를 치르며 3,500골 이상을 넣었다. 그리고 경기 수익을 부상병과 실직한 제대군인을 돕는 데 썼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만 파운드 규모다.

1921년 무렵 잉글랜드에는 여자축구팀이 150개쯤 있었다. 구디슨 파크의 5만 3천 명은 갑자기 튀어나온 숫자가 아니었다.

잉글랜드축구협회 - 여자축구 금지 결정

1921년 12월 5일, 잉글랜드축구협회 이사회가 열렸다.

짧은 비공개 논의 끝에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협회 소속 구단의 경기장에서 여자축구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유로 두 가지가 제시됐다. 하나는 자선경기 수익 중 실제 기부되는 비율이 낮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축구가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협회는 축구가 여성의 몸에 무리를 주고 출산 능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근거로는 몇몇 의사들의 견해가 인용됐다. 실증 자료는 없었다.

이 시리즈의 5편에서 여자가 오래 달리면 자궁이 떨어진다는 주장을 다뤘다. 같은 논리다. 다른 종목, 다른 나라, 같은 문장.

회의록 네 문장이 여자축구를 변두리로 밀어냈다.

1971년, 마침내 허락되다 

딕 커 레이디스는 그만두지 않았다.

1922년 북미 순회에 나섰다. 캐나다에 도착해 보니 경기가 모두 취소돼 있었다. 미국에서는 여자팀 상대가 없어 남자팀과 붙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이들은 개 경주장과 동네 공원에서 경기를 했다. 5만 3천 명 앞에서 뛰던 팀이 그렇게 됐다.

다른 팀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협회의 압박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금지가 풀린 것은 1971년이다. 50년이다.

릴리 파는 그 해제를 살아서 봤다. 열네 살에 시작한 사람이 예순여섯에 자기 종목이 다시 허용되는 것을 본 셈이다.

구디슨 파크의 5만 3천 명이라는 여자 클럽 경기 관중 기록은 그 뒤로 99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정직하게 덧붙이면

이 이야기를 쓸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날의 5만 3천 명이 당시의 평균이었던 것은 아니다. 남자 축구는 전쟁으로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중단됐다가 회복 중이었고, 그해 크리스마스 시즌 남자 리그 경기는 12월 25일과 27일에 열렸다. 12월 26일에는 남자 경기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날은 예외적인 날이었다. 이 숫자가 100년이 지나도록 회자되는 이유도 그것이 표준이 아니라 예외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인정하고 나면 질문이 오히려 선명해진다.

여자축구가 남자축구만큼 인기 있었느냐가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그 종목이 어디까지 갈 수 있었는지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150개 팀이 있었고, 학교에서 여자아이들이 공을 찼고, 스타 선수가 있었다. 그 전부가 회의록 네 문장으로 정지됐다.

죽은 종목이 아니라 죽인 종목이다. 이 시리즈 3편에서 다룬 씨름과 미국 복싱은 여러 이유로 서서히 무너졌다. 여자축구는 그렇지 않았다.

1990년 9월, 동대문운동장

이제 한국이다.

한국에 축구가 들어온 것은 120년이 넘었다. 여자축구 대표팀이 처음 꾸려진 것은 1990년이다.

대학팀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만들었다. 그해 9월 동대문운동장에서 일본과 첫 국제 경기를 치렀다.

결과는 1대 13이었다.

이 스코어는 지금도 한국 여자축구의 최다 점수차 패배 기록으로 남아 있다. 시작이 그랬다.

잉글랜드에서 금지가 풀리고도 2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한국 여자축구는 이제 막 첫 경기를 치른 것이다. 금지당한 적이 없는데도 늦었다. 금지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2010년, 한국 축구 최초의 우승컵

그런데 20년 뒤 이야기가 달라진다.

2003년 한국은 처음으로 여자 월드컵 본선에 나갔다. 2002년 한일월드컵 잉여금이 여자축구에 투입되면서 연령별 대표팀이 꾸려지고 전임 지도자가 배치됐다. 초등학교에 여자 축구부가 생기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WK리그가 출범했다.

그리고 2010년 여름이 왔다.

7월 독일에서 열린 FIFA U-20 여자 월드컵에서 한국이 3위를 했다. 9월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열린 U-17 여자 월드컵에서는 우승했다.

한국 축구가 FIFA 주관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남녀를 통틀어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일하다.

2015년에는 성인 대표팀이 월드컵 16강에 올랐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

한국 축구의 최고 성적을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 2002년 월드컵 4강을 말한다.

그런데 4강은 우승이 아니다. 우승컵을 실제로 들어 올린 것은 2010년의 열일곱 살 이하 여자 선수들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도 이 글을 준비하면서 다시 확인했다.

여자축구 대표팀은 아직 올림픽 본선에 나간 적이 없다. WK리그의 관중 규모나 처우도 갈 길이 멀다. 2010년의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시리즈의 3편에서 나는 종목이 죽는 것은 조용하다고 썼다. 사람들이 하나씩 다른 문으로 나가고 마지막에 불이 꺼진다고.

종목이 자라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조용하다. 아무도 금지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투자하지 않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921년 잉글랜드축구협회는 여자축구를 금지하기 위해 회의를 열고 결의안을 통과시켜야 했다. 명분을 만들고 의사들의 견해를 인용해야 했다.

그만큼 여자축구가 컸기 때문이다. 막으려면 노력이 필요할 만큼.

지금은 아무도 금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종목들은 자라지 못한다.

 

무엇이 더 나은 상황인지 나는 가끔 헷갈린다.

릴리 파가 예순여섯에 금지 해제 소식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자기 선수 생활은 이미 끝난 뒤였다. 다음 세대가 자기가 못 뛴 경기장에서 뛰게 됐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2010년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우승컵을 든 그 선수들은 지금 서른 언저리가 됐을 것이다.

그들이 들어 올린 트로피는 아직도 한국 축구가 가진 유일한 FIFA 우승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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