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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축구: 파올로 로시 - 월드컵에서 부활하다

by marsol-sports 2026.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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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 멈춰 있던 사나이

1982년 7월 5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리아 경기장. 월드컵 2차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와 브라질이 만났다.

당시 브라질은 세계 최고의 팀으로 불렸다. 지쿠, 소크라치스, 팔캉, 에데르. 이 대회에서 네 경기를 치르며 이미 열세 골을 넣었고, 사람들이 아름다운 축구라 부르던 것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날은 비기기만 해도 준결승에 오를 수 있었다.

 

이탈리아는 정반대였다. 1차 조별리그에서 폴란드, 페루, 카메룬과 모두 비겨 득점 수에서 카메룬에 앞선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 아르헨티나를 2-1로 꺾긴 했지만, 그것도 클라우디오 젠틸레가 마라도나를 90분 내내 지워버린 결과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등번호 20번 공격수는 이 대회에서 아직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있었다.

이름은 파올로 로시. 불과 몇 주 전까지 그가 대표팀에 뽑힌 것 자체가 논란이었다.

파올로 로시
파올로 로시

2년의 공백

로시는 1980년 이탈리아 축구계를 뒤흔든 토토네로 불법 베팅 사건에 연루돼 3년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 당시 그는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선수였다.

 

그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고, 항소를 거쳐 징계는 2년으로 줄었다. 징계가 풀린 것은 월드컵을 두 달쯤 앞둔 시점이었다. 유벤투스에서 시즌 막바지 몇 경기를 뛴 것이 그의 실전 경험 전부였다.

2년 동안 공식 경기를 뛰지 못한 공격수를, 그것도 대표팀에서 3년 가까이 골이 없던 선수를 월드컵에 데려가는 것이 옳은가. 이탈리아 언론이 이 질문을 반복했다.

베아르초트의 고집

감독 엔초 베아르초트는 바꾸지 않았다.

그가 로시를 부른 이유는 분명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로시는 세 골을 넣으며 이탈리아를 4위로 끌어올린 선수였다. 다만 그때 짝을 이뤘던 로베르토 베테가는 이미 은퇴한 뒤였고, 베아르초트에게는 골을 넣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로시를 스페인으로 데려갔고, 계속 선발로 내보냈다.

4경기 0골

폴란드전 0골. 페루전 0골. 카메룬전 0골. 그리고 아르헨티나전에서도 0골.

네 경기가 지나도록 그는 침묵했다. 비판은 갈수록 거세졌고, 로시 본인은 훗날 그때의 압박을 화산이 터지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베아르초트의 대응은 선수 교체가 아니라 차단이었다. 그는 대표팀 전체에 언론 접촉 금지령을 내렸다. 바깥과 연결을 끊어 팀을 안으로 묶은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경기가 왔다. 상대는 브라질이었다.

5분

경기 시작 5분, 오른쪽에서 브루노 콘티가 드리블로 브라질 수비를 흔들었다. 공이 왼쪽으로 넘어갔고 안토니오 카브리니가 크로스를 올렸다.

그 공이 프란체스코 그라치아니의 머리 위를 넘어, 뒷공간으로 파고들던 로시 앞에 정확히 떨어졌다. 그가 머리로 아래를 향해 눌러 찍었다.

 

이탈리아 1-0. 대회 다섯 번째 경기 만에 나온 첫 골이었다.

브라질은 흔들리지 않았다. 7분 뒤 지쿠가 젠틸레를 등지고 돌아서며 찔러준 공을 소크라치스가 극단적인 각도에서 골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1-1. 브라질 축구의 철학을 요약하는 골이라는 평이 붙은 장면이었다.

25분

그런데 전반 25분, 브라질 수비진에서 옆으로 건넨 패스 하나가 부주의했다.

로시가 그 공을 가로챘다. 그리고 골키퍼 발디르 페레스의 왼쪽으로 침착하게 밀어 넣었다. 2-1.

후반 23분에는 팔캉이 페널티박스 앞에서 강력한 슛으로 2-2를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 브라질은 다시 준결승에 한 발을 걸쳤다. 비기면 되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74분

후반 29분, 이탈리아가 코너킥을 얻었다.

올라온 공을 브라질 수비가 제대로 걷어내지 못했고, 혼전 속에서 골문 앞에 있던 사람이 또 로시였다. 그가 밀어 넣었다. 3-2.

브라질은 마지막까지 밀어붙였다. 종료 직전 오스카르의 헤딩이 골문으로 향했지만, 마흔 살의 골키퍼 디노 조프가 골라인 위에서 걷어냈다.

경기 종료. 이탈리아 3-2 브라질. 브라질에서는 지금도 이 경기를 '사리아의 비극'이라 부른다.

브라질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파올로 로시
브라질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파올로 로시

끝이 아니었다

보통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로시는 멈추지 않았다.

준결승 상대는 폴란드였고 경기는 캄프 누에서 열렸다. 전반 22분과 후반 28분, 로시가 두 골을 넣었다. 이탈리아 2-0 승리.

네 경기 무득점이던 선수가 두 경기에서 다섯 골을 넣은 것이다.

결승

7월 11일, 마드리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상대는 서독이었다.

전반은 0-0으로 끝났다. 다만 이탈리아에는 아쉬운 장면이 하나 있었다. 카브리니가 페널티킥을 얻고도 골문 옆으로 차 버린 것이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페널티킥이 실패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후반 12분, 젠틸레가 오른쪽에서 올린 크로스를 로시가 머리로 밀어 넣었다. 1-0.

이후 마르코 타르델리의 왼발 슛이 두 번째 골로 이어졌다. 그가 골문을 등지고 달려나오며 울부짖던 장면은 이 대회에서 가장 유명한 세리머니로 남았다. 알레산드로 알토벨리가 세 번째 골을 더했고, 파울 브라이트너가 만회골을 넣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탈리아 3-1 서독. 마흔 살의 주장 조프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6골

대회 초반의 로시는 0골이었다. 대회가 끝났을 때 그의 이름 옆에는 6골이 남았다.

브라질전 3골, 폴란드전 2골, 서독전 1골. 전부 마지막 세 경기에서 나왔고, 전부 결정적이었다.

그는 득점왕과 골든볼을 동시에 받았고, 그해 발롱도르까지 가져갔다.

가장 늦은 부활

이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는 골의 개수가 아니다.

첫 경기부터 골을 넣었다면 그저 좋은 대회로 남았을 것이다. 그는 네 경기 동안 침묵했고, 다섯 번째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했다. 월드컵 득점왕 중에 첫 골이 이보다 늦은 선수는 없다.

보통 공격수는 골을 넣어야 자신감을 얻는다. 로시의 경우는 순서가 반대였다. 믿음이 먼저 있었고 골이 뒤에 왔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

온 나라가 로시를 빼라고 했다. 베아르초트는 바꾸지 않았다.

로시 본인도 훗날 이 점을 강조했다. 다른 감독이었다면 자신을 계속 기용했을지 모르겠다고. 감독이 버티지 않았다면 사리아의 해트트릭도 없었다.

 

브라질전 전날 밤, 베아르초트가 로시의 방을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로시는 선발 제외 통보인 줄 알았는데, 감독은 축구 이야기 대신 피카소와 달리 같은 화가 이야기를 한참 하다 돌아갔다는 것이다. 선수의 어깨에서 힘을 빼려는 방식이었다.

첫 골이 바꾼 것

로시는 훗날 브라질전 첫 골을 자기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골로 꼽았다. 그 골이 자신을 열어줬다는 표현을 썼다.

2년의 공백, 대표팀에서 3년 가까운 침묵, 월드컵 4경기 무득점, 그리고 언론의 집중포화. 그 모든 것이 한 번의 헤딩으로 풀렸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자기 쪽으로 굴러오는 것 같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지나친 미화는 곤란하다

한 가지는 짚어둘 필요가 있다.

그의 1982년은 토토네로라는 무거운 그림자에서 시작됐다. 그는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지만 징계를 받았고 2년을 잃었다. 이 사건을 두고 그가 승부조작을 했다고 단정할 수도,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정확한 사실은 그가 사건에 연루돼 징계를 받았고, 3년이던 처분이 항소로 2년이 됐으며, 그 징계가 끝난 두 달 뒤 월드컵에 나섰다는 것이다.

남는 것

운동선수에게 2년은 길다. 그동안 동료들은 성장하고, 새 선수가 등장하고, 몸은 달라지고, 감각은 무뎌진다. 한 번 대표팀에서 멀어지면 돌아오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로시는 돌아왔고, 돌아와서도 네 경기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 그를 계속 내보냈고, 다섯 번째 경기부터 모든 것이 터졌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지쿠와 소크라치스, 마라도나와 루메니게를 떠올린다. 그러나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 가운데 하나는 여전히 파올로 로시다.

그가 보여준 것은 득점력만이 아니었다. 오래 기다린 끝에 찾아온 한 번의 기회를 붙잡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한 달이었다.

파올로 로시는 2020년 12월 9일, 예순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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