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여름, 헬싱키에서 제15회 올림픽이 열렸다.
같은 해, 한반도에서도 올림픽이 두 번 열렸다. 하나는 북쪽 벽동의 포로수용소에서, 다른 하나는 남쪽 거제도의 포로수용소에서.
양쪽 다 실제로 '올림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기를 했고, 순위를 매겼고, 사진을 찍었고, 기록물을 남겼다.
그리고 양쪽 다 선전물이었다.

압록강 인근 벽동 - 유엔군 포로 수용소
압록강 인근 벽동에 유엔군 포로를 수용하던 시설이 있었다.
1952년 그곳에서 수용소간 올림픽이 열렸다. 북한 내 여러 포로수용소를 대표하는 팀들이 모였다.
종목이 놀랍도록 다양했다. 미식축구, 야구, 소프트볼, 농구, 배구, 육상, 축구, 체조, 복싱. 줄다리기도 있었다.
포로들이 사진사와 아나운서와 기자 역할을 맡았다. 매일 경기가 끝나면 대회 소식지를 발행했다. 화보집도 만들어졌다.
종합 성적 1위는 5수용소, 2위는 1수용소, 3위는 4수용소였다.
살아남은 화보집에는 참가자들의 소감이 실려 있다. 이곳에서 지낸 기간 중 가장 대단한 볼거리였다는 식의, 밝고 들뜬 문장들이다.
화보집의 문장
이 대목에서 나는 오래 멈췄다.
포로들이 쓴 그 문장들은 진심이었을까, 강요된 것이었을까.
둘 다일 수 있다. 수용소 생활에서 며칠간의 운동회가 실제로 반가웠을 수 있다. 친구를 만날 기회이기도 했다. 다른 수용소에 있는 동료가 살아 있는지 확인할 유일한 통로였을 수도 있다.
동시에, 그 화보집이 어디에 쓰였는지도 사실이다.
벽동 올림픽 사진은 심리전 전단에 실려 전선의 유엔군 병사들에게 뿌려졌다. 메시지는 명확했다. 항복하면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포로들이 정말로 즐거웠다고 해도, 그 즐거움은 선전 자료가 됐다. 두 사실은 서로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거제도 공산군 포로수용소
같은 시기 남쪽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1950년 11월부터 조성됐다. 최대 수용 인원이 17만 명대였다. 인민군 15만, 중국군 2만, 여성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규모였다.
이곳에서도 포로 올림픽이 열렸다. 영상 기록이 남아 있고, 2018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등에서 발굴된 자료가 국내에 공개됐다.
같은 전시에 북한 벽동수용소 포로 올림픽 화보집이 나란히 걸렸다. 전시를 기획한 쪽은 이렇게 설명했다. 냉전 체제 아래 양측이 올림픽 정신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포로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두고 체제 우월성을 경쟁적으로 선전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같은 해, 같은 반도의 양쪽 끝에서, 서로를 향해 같은 방식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에 찍히지 않은 것
거제도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그 사진과 거리가 있었다.
수용소는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로 갈려 있었다. 송환을 원하는 쪽과 남기를 원하는 쪽이었다. 두 진영 사이에 유혈 사태가 반복됐다.
1952년 5월 7일, 제76수용소의 포로들이 수용소장이던 미군 준장을 납치했다.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사흘 뒤 그는 풀려났지만, 유엔군 사령부는 협박에 의한 합의라며 무효를 선언했다.
이후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와 부상자가 나왔다. 17만 명이 들어차 있던 거제도는 여러 수용소로 분산됐다.
같은 해에 운동회 사진이 찍혔고, 같은 해에 이런 일이 있었다.
매그넘 소속 사진가 베르너 비쇼프가 1952년 거제도를 찾았다. 그가 남긴 사진 중에 운동장 뒤편의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포로들의 모습이 있다.
한국 언론은 훗날 이 사진들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조각품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포로들의 사진은 유엔군의 선전용이었을 것이라고.
스포츠가 하는 일
이 시리즈의 10편에서 나는 스포츠가 국가의 운명에 아무런 방어력이 없다고 썼다. 원인도 방패도 아니고, 그 시대의 온도를 보여주는 표시등에 가깝다고.
포로수용소의 올림픽은 그 문장의 극단적인 사례다.
여기서 스포츠는 방패도 아니고 표시등도 아니었다. 도구였다.
우리는 스포츠에 정치가 개입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두 대회는 정치가 개입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정치가 만든 것이다. 경기가 있었고 선수가 있었고 순위가 있었지만, 그 대회가 존재한 이유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그 안에서 뛴 사람들까지 도구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철조망 안에서 미식축구를 하고 복싱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그 며칠 동안 무엇을 느꼈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는다. 화보집에 실린 문장은 검열을 통과한 것이니 그대로 믿기 어렵고, 검열되지 않은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인간이 갇힌 곳에서 공을 차기 시작하는 것은 한국전쟁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2차 대전 중 유럽의 포로수용소에서도 갇힌 사람들이 경기를 조직했다. 축구 리그를 만들고 순위표를 붙였다. 어떤 곳에서는 그것 역시 촬영돼 선전에 쓰였다.
갇힌 사람들이 공을 차는 이유와, 가둔 쪽이 그것을 찍는 이유는 다르다. 같은 장면 안에 두 가지 이유가 겹쳐 있을 뿐이다.
헬싱키 올림픽
1952년 7월, 헬싱키 올림픽이 열렸다.
한국은 전쟁 중이었다. 그럼에도 선수단을 보냈다. 부산이 임시 수도이던 시절이다.
이 시리즈 17편에서 1948년 생모리츠와 런던에 나간 선수단 이야기를 했다.
정부도 서기 전에 복권을 팔아 여비를 마련해 보낸 선수단이었다.그로부터 4년 뒤 나라는 반으로 갈라져 전쟁 중이었고, 그 와중에 다시 선수단이 떠났다.
같은 해 여름, 같은 반도의 철조망 안에서는 두 개의 가짜 올림픽이 열리고 있었다.
거제도에서 남쪽으로 배를 타고 나가면 부산이고,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면 헬싱키였다.
정전협정은 이듬해인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됐다. 거제도 수용소는 그 뒤 폐쇄됐다. 친공 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갔다.
지금 거제도에는 수용소 건물 일부가 남아 박물관이 됐다.
벽동 올림픽 화보집은 미국의 수집가들 손을 거쳐 돌아다녔다. 한국전쟁 유물 중에서도 희귀한 축에 든다고 한다.
그 안에 실린 사진 속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어느 수용소 소속인지, 몇 번 팀인지만 적혀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들이 1952년 여름 어느 며칠 동안 공을 찼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사진이 찍힌 이유가 그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