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과 스포츠

환호가 끝나고 전쟁이 시작되기까지

by marsol-sports 2026. 8. 12.

1950년 6월 3일, 김포 비행장에서 경무대까지 수만 명이 몰려나왔다. 카퍼레이드였다. 보스턴 마라톤에서 1위, 2위, 3위를 모두 휩쓴 선수들이 돌아온 날이다.

22일 뒤인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됐다.

 

1969년 6월 27일, 멕시코시티에서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를 3대 2로 꺾고 월드컵 예선을 통과했다. 17일 뒤인 7월 14일, 엘살바도르 군대가 온두라스를 침공했다.

한쪽에서는 승리가 전쟁에 삼켜졌고, 다른 쪽에서는 승리가 전쟁의 도화선 옆에 놓였다.

950년 보스톤 마라톤대회 금.은.동메달을 휩쓴 한국인(함기용,송길윤,최윤칠)
1950년 보스톤 마라톤대회 금.은.동메달을 휩쓴 한국인(함기용,송길윤,최윤칠)

1950년 4월 19일, 보스턴

그날 보스턴에는 눈보라가 날렸다.

한국 선수단의 단장 겸 감독은 손기정이었다. 1936년 베를린에서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사람이 이번에는 태극기를 단 선수들을 데리고 왔다.

 

세 해 전인 1947년, 그가 지도한 서윤복이 같은 대회에서 우승했다. 2시간 25분 39초. 손기정이 1935년에 세운 기록을 12년 만에 넘어선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김구는 서윤복에게 '족패천하'라는 휘호를 써주었다. 발로 천하를 제패했다는 뜻이다.

 

1950년의 세 선수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었다. 이 중 함기용은 열아홉 살, 양정고보 3학년이었다.

레이스 중반까지 그는 50위 밖에 처져 있었다. 그러다 하나씩 앞사람을 제치기 시작했다. 선배 최윤칠까지 추월할 때 먼저 가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록은 함기용 2시간 32분 39초, 송길윤 2시간 35분 58초, 최윤칠 2시간 39분 45초. 1, 2, 3위였다.

마라톤에 본격 입문한 지 4년, 풀코스 네 번째 완주에서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김치가 비결이라고 했다

현지 언론이 몰려들었다. 군산 출신 송길윤은 보스턴 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우승 비결이 김치라고 답했다. 서양 기자들이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었다.

한국 선수단은 항공편이 없어 미 군용기를 얻어 타고 보스턴에 갔다. 그런 나라에서 온 청년들이 1, 2, 3위를 휩쓴 것이다.

손기정은 훗날 자서전에 그날 보스턴 하늘에 태극기만 가득했다고 썼다.

6월 3일 귀국 행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관 몇백 명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애국했다고 격려했다. 신생 국가에게 이 우승은 실제로 외교였다.

6.25 전쟁

그리고 6월 25일이 왔다.

카퍼레이드의 환호가 채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김포에서 경무대까지 태극기를 흔들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그달을 넘기지 못하고 피난길에 올랐다.

 

발로 천하를 제패했다는 말이 무색해졌다. 마라톤 우승은 나라를 지켜주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당연함이 22일 만에 증명되는 광경은 잔인하다.

 

세 선수의 이후는 각자 달랐다. 함기용은 2022년 아흔둘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 육상의 원로로 살았다. 그는 자기 우승이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선수가 메이저 마라톤에서 거둔 첫 우승이라는 점을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손기정은 광복 전, 서윤복은 미군정 시절이었으니까.정부가 수립되고, 그 정부의 이름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두 달 만에 그 나라가 반으로 갈라졌다.

 

1969년 6월, 테구시갈파

이제 중미로 간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 만났다. 개최국 멕시코가 자동 출전권을 가져간 상황이라 남은 자리는 하나였다.

 

1차전은 6월 8일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 경기 전날 밤 원정팀 숙소 창문으로 돌과 폭죽이 날아들었다. 엘살바도르 선수들은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온두라스가 1대 0으로 이겼다.

 

2차전은 6월 15일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 이번에는 반대였다. 온두라스 선수단 숙소 앞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사망자가 나왔다. 경기는 엘살바도르가 3대 0으로 이겼다.

 

1승 1패. 3차전은 6월 27일 멕시코시티 중립 지역에서 열렸다. 연장 후반에 터진 골로 엘살바도르가 3대 2로 이겼다.

그날 두 나라는 외교 관계를 끊었다.

1970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전쟁

1970년 7월 14일

7월 14일 저녁, 엘살바도르 공군이 온두라스를 공습했다. 지상군도 국경을 넘었다.

전쟁은 약 100시간 만에 끝났다. 미주기구가 중재한 휴전이 7월 18일 밤에 합의됐고 20일에 완전히 발효됐다. 그래서 이 전쟁의 다른 이름이 백시간 전쟁이다.

 

사망자 추정치는 자료마다 2,000명에서 6,000명까지 갈린다. 난민은 30만 명 규모로 추산된다.

여담이지만 이 전쟁에서 2차 대전 시절 프로펠러 전투기들이 마지막으로 공중전을 벌였다. 세계사의 한 장이 중미의 작은 나라 두 곳에서, 축구 예선 때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닫힌 것이다.

축구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거짓말

여기서 정정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전쟁의 별명이 축구 전쟁이지만, 축구가 원인은 아니었다.

진짜 원인은 땅이었다. 온두라스의 토지 개혁, 그리고 그 땅에 들어와 살던 수십만 명의 엘살바도르 이주민. 온두라스가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면서 양국 관계는 이미 파열 직전이었다. 두 나라 모두 군사 정권이었고, 양쪽 언론은 국민 감정을 부추겼다.

 

축구는 그 위에 떨어진 성냥이었다. 불이 붙을 준비가 이미 다 되어 있었다.

야담을 쓰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사건에 붙은 별명이 그 사건을 가장 크게 왜곡한다는 점이다. 축구 전쟁이라는 이름은 기억하기 쉽고 이야기하기 좋지만, 실제로 무엇 때문에 수천 명이 죽었는지는 오히려 가린다.

스포츠가 할 수 없는 일

두 이야기는 정반대처럼 보인다. 하나는 스포츠가 전쟁에 삼켜진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스포츠가 전쟁의 방아쇠 옆에 놓인 이야기다.그런데 결론은 같다. 스포츠는 국가의 운명에 아무런 방어력이 없다.

 

우리는 종종 스포츠에 그런 힘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남북 단일팀이 평화를 만든다거나, 올림픽이 갈등을 녹인다거나. 실제로 그런 순간이 있기는 하다. 다만 그 순간은 짧고, 정치가 마음먹으면 22일이면 지워진다.

 

반대로 스포츠가 전쟁을 일으킬 힘도 없다. 17일 만에 침공이 벌어졌다고 해서 축구가 그것을 만든 것은 아니다.

스포츠는 원인도 방패도 아니다. 그저 그 시대의 온도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표시등에 가깝다.

 

1950년 4월의 보스턴 하늘에 태극기가 가득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두 달 뒤를 몰랐다.

1969년 6월의 멕시코시티에서 연장 골이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그 몇 분 동안, 세상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나는 그 몇 분이 스포츠가 가진 전부라고 생각한다.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