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의 천하장사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회가 없어진 것도 아닌데 그렇다.
1985년 3월 18일, 제6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결승. 이만기와 이준희가 붙은 그 경기의 시청률은 68퍼센트였다. 2년 전 제1회 대회 최고 시청률도 61퍼센트였다. 월드컵 한국 대표팀 경기가 황금시간대에 편성됐을 때나 나오는 수치다.
민속씨름 중계가 KBS 뉴스 9의 방송 시각을 미루게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 종목은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다.

스타가 만든 것, 스타가 가져간 것
민속씨름은 1983년 4월 장충체육관에서 시작됐다. 제5공화국 문화정책의 산물이라는 배경이 있었지만, 시작하자마자 관중은 진짜였다.
첫 대회에서 무명의 대학생 이만기가 우승했다. 우승 후보 이준희를 준결승에서 꺾은 이변이었다.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이 천하장사 자리를 나눠 갖던 1980년대 후반이 절정이었다. 명절이면 온 가족이 TV 앞에 모였다.
1989년 3월, 강호동이 데뷔했다. 슈퍼스타가 한 명 더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가 1990년대 초 돌연 은퇴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백승일, 이태현, 신봉민, 김영현, 최홍만이 뒤를 이었다. 나쁜 선수들이 아니었다. 다만 이만기나 강호동만큼 사람을 끌어당기지 못했다. 종목의 인기가 특정 개인에게 얹혀 있었다는 사실이 그때 드러났다.
이것이 첫 번째 병이다. 스타로 흥한 종목은 스타가 떠날 때 함께 무너진다.
1997년, 씨름 팀이 사라지다
두 번째 타격은 밖에서 왔다.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기업 씨름단들이 줄줄이 해체됐다.
씨름은 프로 종목이었지만 관중 수입으로 굴러가는 구조가 아니었다. 기업이 팀을 운영하고 방송이 중계하는 구조였다. 기업이 흔들리자 팀이 없어졌고, 팀이 없어지자 대회 규모가 줄었고, 대회가 줄자 중계가 줄었다.
한 번 끊어진 고리는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씨름계의 집안싸움
세 번째는 스스로 낸 상처다. 이게 가장 아프다.
프로 리그를 주관하던 한국씨름연맹과 아마추어를 관장하던 대한씨름협회의 갈등이 2000년대 중반 극에 달했다. 연맹은 이만기를 영구제명했다. 협회가 천하장사·백두장사·한라장사 대회를 열겠다고 하자, 연맹은 그 이름들이 자기네 고유 상표라며 개최를 막았다.
그 결과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천하장사 대회가 아예 열리지 않았다.
1983년부터 2004년까지 42회 이어지며 KBS가 전 경기를 생중계하던 대회가, 어른들 싸움으로 3년간 사라진 것이다. 현대 씨름단이 연맹을 탈퇴하면서 연맹은 명맥만 남았고 협회 중심으로 재편됐다. 정상화는 됐다. 다만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 사이 최홍만은 K-1으로, 이태현은 프라이드로, 김영현은 K-1으로 무대를 옮겼다. 모래판이 키운 몸들이 다른 링으로 걸어 나갔다.
지구 반대편의 같은 증상 - 미국 복싱
이제 태평양을 건너간다.
미국 남자 복싱은 올림픽에서 통산 49개의 금메달을 땄다. 다른 어느 나라의 전체 메달 수보다도 많은 숫자다. 1952년 플로이드 패터슨, 1960년 캐시어스 클레이, 1964년 조 프레이저, 1968년 조지 포먼. 올림픽 챔피언이 곧 헤비급 세계챔피언이 되던 시절이다.
그런데 2004년 앤드리 워드 이후 미국 남자 선수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못하고 있다. 2024년 파리에서는 동메달 하나가 전부였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 복싱계가 그 쇠퇴의 출발점으로 지목하는 지점이다. 1988년 서울. 로이 존스 주니어가 금메달을 빼앗긴 그 경기다. 미국 아마추어 복싱의 위상이 그때부터 꺾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시리즈의 지난 이야기가 이번 이야기의 원인 중 하나로 등장한다.
복싱중계 - 공짜에서 유료로 전환
미국 복싱이 앓은 병은 씨름과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한때 복싱은 공중파에서 공짜로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유료 케이블로 옮겨갔고, 다시 페이퍼뷰로 옮겨갔다. 큰 경기는 돈을 내야 볼 수 있게 됐고, 작은 경기는 어디서 하는지도 알기 어려워졌다.
2018년, HBO가 45년 만에 복싱 중계에서 손을 뗐다. 이유는 시청자 감소였다. 그해 HBO 복싱 중계의 평균 시청자는 82만 명, 전체 시청자의 2퍼센트에 불과했다.
여기에 세계 챔피언 벨트가 네 개 기구(WBC,WBA,IBF,WBO)로 쪼개지면서 누가 진짜 챔피언인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게 됐다. 그 자리를 UFC가 채웠다. 단일 조직, 단일 챔피언, 명확한 서사. 젊은 관객은 그쪽으로 갔다.
씨름은 스타를 잃고 돈을 잃고 내부에서 싸웠다. 미국 복싱은 노출을 잃고 정통성을 잃고 경쟁자에게 밀렸다. 병명은 달랐지만 죽어가는 모양은 비슷했다.
스포츠 종목이 죽는다는 것
스포츠 종목이 죽는다고 해서 그 재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씨름을 하던 몸은 격투기로 갔고, 강호동은 예능으로 갔고, 이만기는 방송과 강단으로 갔다.
미국에서 복싱 체육관에 갔을 아이들은 NFL과 NBA와 UFC로 갔다. 재능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흘러가는 방향이 바뀔 뿐이다.
그래서 종목의 죽음은 조용하다. 어느 날 문이 닫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씩 다른 문으로 나가고 마지막에 불이 꺼진다.
씨름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다
2018년 11월 26일, 아프리카 모리셔스 포트루이스. 제13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씨름이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올랐다.
남과 북이 함께 올린 것이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역사상 남북 공동 등재는 이것이 처음이다. 아리랑도 김치도 각각 따로 올라 있었는데, 씨름만 함께 올랐다.
위원회는 남북의 씨름이 몸과 마음을 함께 기르고 마을 공동체를 묶어낸다는 점에서 같다고 판단했다.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전례 없는 일이라고 했다.
프로 종목으로서의 씨름이 무너진 자리에서, 문화유산으로서의 씨름이 살아났다. 흥행이 사라진 뒤에야 그 종목의 다른 얼굴이 보인 셈이다.
이걸 부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유네스코 목록에 오른다고 시청률 68퍼센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떤 종목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대회가 열리면 살아 있는 것인가, 중계가 되면 살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린아이가 그걸 보고 저걸 해보고 싶다고 말하면 살아 있는 것인가.
1985년 3월의 그 밤, TV 앞에 모여 앉았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씨름 규칙을 정확히 몰랐을 것이다. 그래도 봤다. 잡고, 버티고, 넘어뜨리는 것을 보는 데 규칙은 필요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면, 우리가 잃은 것은 종목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모여 앉던 방식이었을까.